스위스 제약 대기업 노바티스(Novartis)가 미국에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글로벌 제약 업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이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의약품 수입에 대해 25% 이상의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을 다시 강조한 가운데 나온 결정이다. 이러한 관세 위협은 제약 기업들이 미국 내 생산과 연구개발을 강화하도록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노바티스는 이를 기회로 삼아 미국 시장에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노바티스는 앞으로 5년 동안 총 230억 달러(approximately $23 billion)를 투자해 미국 내 제조 및 연구개발(R&D, Research and Development) 인프라를 대폭 확충할 계획이다. 이 투자에는 10개 시설의 신설 및 확장이 포함되며, 그중 7개는 완전히 새로운 시설이다. 특히 눈에 띄는 프로젝트는 샌디에이고에 설립될 생물의학 연구 혁신 허브(biomedical research innovation hub)로, 약 11억 달러가 투입될 예정이다. 이 허브는 2028년에서 2029년 사이에 문을 열 예정이며, 미국에서 노바티스의 두 번째 글로벌 R&D 중심지로 자리 잡아 캘리포니아의 풍부한 과학 인재를 활용할 계획이다. 이곳에서는 첨단 의약품 개발을 위한 최신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함께 노바티스는 생물약제(biologics), 화학 제제 성분(chemical drug substances), 기기 조립(device assembly), 그리고 포장(packaging)을 담당하는 4개의 새로운 제조 시설을 추가로 건설한다. 이들 시설의 구체적인 위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의약품 생산 공정을 아우르며 미국 내 공급망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방사성 리간드 치료제(radioligand therapy, RLT) 생산을 강화하기 위해 플로리다와 텍사스에 각각 새로운 제조 시설을 짓고, 기존의 인디애나, 뉴저지, 캘리포니아 소재 3개 RLT 시설을 확장한다. RLT는 암세포를 표적으로 방사선을 전달하는 정밀 치료법으로, 노바티스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상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이번 투자에는 노바티스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siRNA(small interfering RNA) 및 역배열 올리고핵산염(antisense oligonucleotide) 제조를 시작한다는 점이 포함된다. siRNA는 유전자 발현을 조절해 신경계 질환 등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는 데 활용되는 최첨단 기술로, 이를 미국 내에서 생산함으로써 노바티스는 글로벌 공급망의 효율성을 높이고 미국 시장의 수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노바티스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모든 주요 의약품을 미국 내에서 완전히 생산(end-to-end production)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된다.
노바티스는 이번 투자가 단순한 시설 확장을 넘어 미국 경제와 과학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약 1,000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 등 고급 인력을 신규 고용하고, 건설 및 지원 업무를 담당할 약 3,000명의 직원을 추가로 채용할 계획이다. 이로 인해 지역 사회에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더불어, 노바티스는 향후 5년간 미국 내 운영에 총 500억 달러(approximately $50 billion)를 투자할 계획이며, 이는 이번 230억 달러를 포함한 금액이다. 이는 미국을 노바티스의 핵심 성장 시장으로 삼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노바티스는 이번 결정의 배경으로 미국의 혁신 친화적인 정책과 규제 환경을 꼽았다. 미국은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으로, 안정적인 법적·규제적 기반과 풍부한 인재 풀을 바탕으로 제약 기업들의 투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노바티스는 이미 미국 내에서 12개의 제조 시설과 영업 조직을 운영 중이지만, 2021년부터 2024년까지 7개 시설을 폐쇄한 바 있다. 이번 투자는 그러한 축소 기조를 뒤바꾸고 미국 내 생산 역량을 대폭 강화하려는 전략적 전환으로 해석된다.
한편, 노바티스의 이번 움직임은 미국 내 다른 제약 기업들의 행보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앞서 일라이 릴리(Eli Lilly)는 270억 달러,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은 550억 달러 규모의 미국 제조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미국 제약협회(PhRMA)에 따르면, 새로운 제조 시설을 짓는 데는 엄격한 규제 요건으로 인해 평균 5~10년의 시간과 약 20억 달러의 비용이 소요된다. 이러한 높은 진입 장벽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국내 제조 촉진 기조가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 결정을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국 중심의 투자 흐름은 유럽 제약 업계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유럽의 제약 업계 리더들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에 미국과 같은 신속하고 대담한 생명과학 정책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연구개발과 제조 인프라가 미국으로 이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글로벌 제약 산업의 경쟁 구도가 미국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노바티스의 이번 투자는 관세 위협이라는 외부 압박 속에서도 미국 시장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향후 제약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과 혁신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